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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시대

무신의 차별 그리고 무신정변(무신정권)의 시작

 

무신정변의 시초 문신의 무신 차별

 

이번에는 바로전에 포스팅했던 교정도감의 주인공들인 무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공민왕릉입니다. 공민왕릉은 북한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무선봉의 산 중턱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북한의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고려왕조는 보통 왕릉만 지었지만 유일한 부부왕릉인 쌍릉이라 이부분만 봐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정은 어느정도 였는지 예상되는 부분입니다.

 

 

 

공민왕릉에서 볼 수 있듯이 문신과 무신의 높이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유추해볼대 문신이 무신의 지휘에 위에 있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신정변의 발단

 

무신정변의 발단은 의종대인 1170년에 발생되었고 고려사에 보면 "의종 24년 8월 그믐날에 수박희(태권도와 유사한 무예의 일종)을 하였는데 대장군 이소응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려 하니, 문신이었던 기거주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쳐서 섬돌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하였다.

 

태권도와 시름의 시초로 알려진 수박희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그림

 

임금과 문신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하는데 정중부,김광미,양숙,진준 등은 낯빛을 바꾸고 서로 눈짓을 주고 있다가 정중부가 한뢰를 보고 '이소응이 비록 무관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심안 모욕을 주는가' 라고 꾸짖으니 임금이 정중부의 손을 잡고 말렸다"고 전해집니다.

 

무신정변의 시작과 문신의 숙청

 

정중부는 무관이었으며 한뢰는 문신으로 전해지는데 이날밤에 무신인 이고는 이의방과 더불어 순검군을 불러 모으고 정변을 일으켜 흥왕사에 있던 문신들을 전부 살해하고 개경으로 대달아 궁궐로 진입하여 역시 문신들을 도륙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도로 유배시키고 왕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를 명종으로 추대하고 무신정권을 세웠다고 합니다.

 

무신정변으로 인한 망국의 시작

 

100여년 동안 계속되는 무신정권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맞춤이었습니다. 내부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일어나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제거되고 경대승이 병으로 죽자 난폭한 이의민이 뒤를 이어 무신정권의 수령이 되었으며, 1196년에 최충헌 일당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드디어 85년의 최씨 무신정권을 수립하게 됩니다. 최씨 무신정권은 그 후 최우,최항,최의로 이어졌고, 최씨 집권이 끝난 뒤에김준,임안,임유무 등이 이를 이었습니다.

 

> 고려시대 무신들의 교정도감에 대해서

 

공포정치로 인해 전국에 난 발생

 

무신들의 공포정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각지에서는 반란과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1173년부터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의난,서경유수 조위총의 난, 명학소의 망이,망소이의 난, 관성,부성의 농민봉기, 김사미와 효심의 농민발란등 이어서도 지속되는 난이 일어났습니다. 고려는 더이상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국가가 아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