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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시대

요동정벌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최영

 

최영과 이성계

 

최영과 이성계는 모두 왜구가 홍건적을 격퇴하는 시대적인 과업을 수행한 영웅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 고려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구세력과 신진세력의 대표주자이다. 처음 공민왕 연간에는 원나라를 물리치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배원천명(원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정책) 개혁운동이 지지를 받았지만 우왕이 들어서자 상황이 바뀌었다.

 

견제세력 이인임의 제거 및 요동정벌 관철

 

구세력을 대표하는 이인임은 친명파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를 견제하고 권력의 현상유지를 위해 친원파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역시 권문세족의 후예인 최영도 친원파의 일원으로 점진적인 국정쇄신을 원했다. 이에 비하면 친명파의 우두머리인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을 위해서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면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맞이해야 한다는 점진적 개혁파의 입장이었고, 정도전과 이성계는 권문세족의 토지를 거두어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토지개혁과 함께 권력구조를 바꾸려는 더욱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가운데 이인임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정몽주,정도전 등 신흥사대부 개혁파의 성장에 불안을 느낀 최영은 고려건국 이래 숙원사업이며 고려의 국시인 고구려의 옜 땅 요동을 되찾아권문세족의 주요 세력인 무신의 권한을 강화하고 나아가 이성계를 대표로 하는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요동정벌이라는 깃발을 내걸었다.마침 이때 명나라는 고려정부와 원나라가 다시 협력관계를 맺는 걸 방지하고자 철령 북쪽의 땅은 원나라에 속한 곳이므로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퉁고하였다. 최영에게는 요동정벌을 관철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이렇게 요동정벌은 결정되었고 최영,조민수,이성계로 구성된 10만명의 요동정벌군은 1388년 4월에 출정식을 단행하였다. 마침 우왕이 평양까지 따라와 최영에게 요동에 가지말고 국내에 머물기를 간청하였으며, 조민수와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이때 이성계는 4대 불가론을 내세워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이성계의 4대 불가론

 

이성계의 4대 불가론을 밀어부쳐 회군하게 되는데 이 내용은 첫째로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른다는 이소역대,두번째는 여름에 출병한다면 농사를 짓지 못한다는 하월출병 세번째로 온나라가 출병하면 왜구가 그 틈을 노려 침략한다는 거국원정 왜승기허 마지막으로 여름 장마철이라 활줄이 늘어나고 병사들은 전염병에 걸린다는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역질이다.

 

조선개국공신 분포도

 

이성계는 개성으로 곧바로 내려와서 최영의 방어군을 격파하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우왕은 강화도로 유배시켰다. 최영은 다시 충주로 보내져 그곳에서 참형을 당하였고 고려의 임금은 이색의 건의에 따라 창이 추대되었다.이성계는 이후 우왕과 장왕은 공민왕의 후손이 아닌 신돈의 후손이라며 새로운 혈통으로 허수아비 임금인 공양왕을 추대하여 고려의 모든 중앙권력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최대의 정적인 조민수,정몽주를 차례대로 제거하고 정도전,조준,남은,이방원등 신진사대부들의 추대를 받아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였다.

 

참고문헌 : 단숨에 읽는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