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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시대

포은 정몽주선생의 년도,이슈별 일대기 정리

 

 

이번에 임고서원에 다녀온 후에 임고서원을 포스팅하다 포은선생의 정보가 부족해 추가로 포은선생의 일대기를 포스팅 합니다. 포은선생의 충절을 확인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포은선생의 일대기 정리

 

1337년 1세(충숙왕 6년) : 12월 22일 영천군 우하리에서 아버지 정운관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몽란이라 이름을 짓다. 9세에 이름을 몽룡으로 고쳤고 관례를 치루고 이름을 몽주로 고쳐짓다.

 

1355년19세(공민왕 4년) : 1월에 아버지 정운관을 여의고 시묘를 하다.

 

1360년 24세(공민왕 9년) : 지공거 김득배가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다.(정몽주의 과거시험 대책문)

 

1362년 26세(공민왕 11년) : 3월에 예문검열을 제수받아 처음 관직에 나아가다. 이때 김용의 모략으로 상주에서 죽임을 당한 김득배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다.

 

1363년 27세(공민왕 12년) : 8월에 종사관으로 동북면도지휘사인 한상신을 따라 화주에서 여진을 정벌하다.

 

1365년 29세(공민왕 14년) : 1월에 어머니를 여의고 시묘를 하다.

 

 

1367년 31세(공민왕 16년) : 상을 마친 후 전공정라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얼마뒤에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의 제수받다.

 

1372년 36세(공민왕 21년) : 3월에 홍사범을 따라 명나라에 가다.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지만 천만 다행으로 살아나다. 다음해 7월에 귀국하여 명나라 황제의 명을 선포하다.

 

 

 

1375년 39세(우왕 원년) :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 것을 상소하여 언양으로 귀양가다.(언양 포은대)

 

1378년 42세(우왕 4년) : 7월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던 윤명,안우세등 수백 인을 데리고 귀국하다. 정순대부우산기상시 보문각제학을 제수받다.

 

1380년 44세(우왕 6년) : 3월에 판도판서를 제수받다. 가을에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 가서 왜구를 격파하고 돌아오다.

 

1384년 48세(우왕 10년) : 7월에 정당문학이 되고 명나라 태조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가다.

 

1387년 51세(우왕 13년) : 6월에 하륜,이숭인등과 건의하여 호복을 폐지하고 중국제도에 ㄸ라 관복을 정하다. 12월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다.

 

1388년 52세(우왕 14년) : 1월에 요동에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아 돌아오다. 7월에 문하찬성사 지서연사를 제수받다.

 

 

 

1389년 53세(공양왕 원년) : 부모의 상에 대한 시묘살이가 조정에 알려져 그가 사는 우항리를 효자리라 이름하고 비석을 세워 이를 기념하였다.(위는 효자리비)

 

 

1392년 56세(공양왕 4년) : 2월에 신정률을 지어 바치다. 4월 4일에 절의를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다.(선죽교의 옛 모습)

 

정몽주 포은선생의 일편단심으로 유명한 단심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당시 정치상을 잘 보여주는 백로가 "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1401년 태종 1년에 문충의 시호를 받다. 세종 14년에 삼강행실도의 충신전에 실리다. 중종 12년에 문묘에 종사되며 하늘의 별이 되어 만고의 충의지사가 되었다.

 

고려사 속의 포은선생

 

조선 건국이후 고려사의 편찬이 전왕조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한것이었음을 염두해 둘때 포은선생에 대한 고려사의 평가는 부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 열전에서는 고려의 사직을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막으려고 햇던 포은선생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