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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근현대시대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흥선대원군


정조의 죽음과 실학의 좌절,서학의 실험이 거부되고 홍경래의 반란으로 표출되는 민란과 민중들의 각성은 더이상 주자학적 이념독재와 패쇄적 사회구조로 지탱해온 조선왕조가 국가의 틀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1800년대의 중반은 세계사적인 변화의 시대입니다. 



60년이나 지속되어온 세도정치의 폐해는 삼정의 문란과 함께 국부를 바닥냈으며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철종이 죽었고 6촌인 이하응인 흥선대원군의 2남인 이명복이 12살의 나이로 26대의 임금인 고종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철종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 조대비의 수렴청정 권한을 넘겨받아 섭정의 직무를 통해 쇄도정치의 기능을수행한비변사를축소시키고의정부와삼군부의권한을환원시켰으며새로운법전인대전통편을편찬하고왕실의권위를세우고자경북궁을 중건하였습니다. 사회개혁의 연장선에서 흥선대원군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던 서원의 철폐에 나서 전국에 있는 600여개의 서원을 47개로 축소하였습니다.



※서원철폐란 유생을 가르치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으로 초기의 서원의 경우는 인재를 양성하고 선현을 배양하여 긍정적인 기능을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혈연,지연,학벌로 인해 평폐가 시작되었습니다. 승선대원군 시절에 대표가 될만한 47개의 서원을 제외하고 모두 철폐한 사건입니다.





선대원군의 개혁조치


첫째 안동김씨의 축출로 인한 세도정치의 종식.둘째로 경북궁 증권으로 인한 왕실 권위의 회복, 셋째로 호포제로 인한 국가재정의 안정, 넷째로 서원을 철폐로 인한 왕권 강화, 다섯째 토지조사로 인한 국가재산 파악, 여섯째 비변사의 축소로 인한 세도정치의 소멸, 일곱번째 환곡제 폐지로 인해 사창제 실시 및 삼정 정비 여덜번째로 문벌타파하여 인재 등용과 지역색 타파 마지막으로 대전통편 편찬으로 국가 기강을 확립하는 개혁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