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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근현대시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시대적 배경


흥선대원군이 1873년에 물러났고 그 자리에 명성왕후와 민씨일가가 대신했습니다. 민씨일가의 권력은 세도정치를 방불케 하였고 백성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 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중앙정부는 신군대를 양성하고자 별기군을 창설하고 전통군대인 5군영의 3곳을 폐쇄하였스빈다. 그리고 별기군의 교관을 일본군인이 맡았으며 전통군대에 대해 차별이 더욱 심해지자 명성왕후를 내쫓고 흥선대원군을 옹립하려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선대원군의 재등장


임오군란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반대로 별기군을 폐지하고 5군영을 다시 설치하였지만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고 임오군란의 주모자를 처형하였습니다. 임오군란을 피해 충주로 피신한 명성왕후가 다시 돌아왔지만 일본은 자국민과 상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조선에는 이때 청,일 양국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갑신정변,청일전쟁,갑오농민전쟁의 대세를 가르는 변수로 작용하는 계기가 만들어 졌습니다. 



임오군란으로 등장한 흥선대원군의 몰락은 척화파의 약세와 개화파의 득세로 전환되면서 개화파 가운데 김홍집,어윤중,김윤식등은 전제군주제와 유교적 입장에서 동도서기론이란 온건개혁을 추진하였고 김옥균,박영효 등은 정치사회 제도를 개혁하고 기독교까지 수용하는 입헌군주제라는 급진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본에 힘을 빌은 갑신정변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의 좌석배치도


임오군란 이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의지하였는데 개화파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강화하였고 개화파들은 일본 근대화세력의 힘들빌어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정변에 성공한 서재필,박영효,윤옹렬 등 개화파들은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 내각은 토지개혁,탐관오리 처벌,군제개혁,국가재정의 일원화,국가기구 축호 등의 공약을 발표하였습니다.


신정변의 3일천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가 창덕궁을 공격하고 이에 일본군이 후퇴하자 개화당의 갑신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데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일본은 갑신정변을 책임을 물어 조선에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고 민씨 정권은 더욱 청나라에 의지하였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으며 우리나라의 반쪽은 일본에 의해 지배되고 반쪽은 청나라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꼴이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포스팅을 하면서도 화가나고 답답합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처지도 열강들에 사이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잘못된 부분을 반성하고 역사를 참고하여 비극이 되풀이하지 않게 역사를 몇번씩 곱씹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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