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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의정부서사제 가족사 비극의 서막



종대왕의 뛰어난 능력


세종대왕은 역대 왕중에 정치,경제를 아우르는 능력이 손에 꼽히는 왕입니다. 과학기술의 보급을 통해 경제개혁을 추진하여 농업생산력의 확대를 정부의 주요한 경제정책으로 삼는 것만 봐도 어느정도 능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농업중심의 국가경제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민본정치의 실현을 위한 기본적인 경제정책이었습니다. 농본상말의 성리학적 경제이념이 조선의 기본이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농본상말이란 농업을 우대하고 상업을 천시한다는 뜻입니다.



세종대왕은 농업생산력의 확대와 문예부흥운동은 당시 조선이 동북아에서 가장 선진적이며 발달한 문명국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때 왕의 교육기준을 잡고 세종대왕의 마인드를 후세왕에게 물려주는 그런체제를 만들었으면 조선이 상당히 발전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집현전을 통한 친위세력의 양성은 문신들의 기반을 강화시켰고 4군6진의 개척과 대마도정벌 같은 주변지역에 대한 방위임무는 김종서등 무신들의 성장에도 기여함으로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종대왕의 의정부서사제


세종대왕은 문치에 관심있는 첫째 문종이 있었고 반면에 무예가 출중한 둘째 수양대군이 있었으며 문필과 무예가 모두 뛰어난 안평대군, 매사에 적극적이고 야심만만한 6째 금성대군등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잦은 병치레와 건강의 악화로 즉위 19년인 1437년에 국왕이 업무를 직할로 관장하던 6조 직할제를 변경하여 의정부서사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세종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국가통치체제로 훗날까지 조선통치체제의 큰 틀로 자리잡습니다. 의정부서사제도는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의견과 보고를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의정부에서 심의하여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제도입니다.


수양대군


하지만 의정부서사제에 문제가 있었는데 강력한 왕권을 발휘하고 통치능력이 있는 군주가 있으면 더할나위 없는 제도이지만 왕이 나이가 어리거나 능력이 없는 임금이 있다면 대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문제점이 내포된 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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