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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시대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그리고 임오화변 이야기


시대의 배경


사도세자는 장헌세자라고도 합니다. 영조와 영빈 이씨의 소생인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과 지내면서 아버지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탕평파세력을 멀리하고 경종을 지지하였던 소론파와 가깝게 지내는등의 아버지의 눈에 나기에 충분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영조


사도세자의 임오화변


영조는 사도세자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초반에는 그려려니 하고 넘어간것으로 추측되나 점차 심해져 나중에는 영주의 분노를 샀다고 합니다. 게다가 노론파의 집중적인 상소와 탄핵요청으로 드디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이른바 임오화변을 일으켰습니다.



임오화변의 원인으로는 세가지정도로 축약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성격적인 요인으로 영조는 급한 성격인 반면에 사도세자는 과묵한 성격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마찰이 꽤 있을것이라는 추측이 있고 정치적 요인으로는 탕평당에 대한 사도세자의 비판적인 시작이 있었고 위에 말한대로 사도세자의 친 소론적인 태도에 있습니다. 어찌보면 정치적 성향이 틀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즘에 우리집에서 겪는 아버지세대와 우리세대간에 정치적 입장이 많이 틀린 이유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건 예로 든것이고 마지막으로 경종에 대한 입장이 틀립니다. 영조가 콤플렉스를 가진 반면에 사도세자는 동정적으로 보는 입장이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영조 38년 5월 22일에 나경언의 고변으로 사도세자는 폐세자가 되고 바로 뒤주에 갇혀 7일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도사제는 뒤주에 갇혀 죽었기 때문에 훗날 뒤주세자라고도 합니다. 거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출생과 살아온일 그리고 사도세자의 일등을 일기형식으로 쓰는데 이것을 한중록 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