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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업적 및 든든한 지원세력 집현전




종대왕 양위시 시대적 배경


세종(이후 세종대왕)은 이방원의 원경왕후 민씨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종대왕 이전에는 충녕대군이라 불리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한 세번째 아들인 세종대왕에게 양위하며 자신은 상왕이 됩니다.  상왕은 살아있는 이전 임금을 말합니다. 



세종대왕은 왕이 되었으나 받쳐주는 세력이 없었고 중앙조정을 움직일 실권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병권이나 실권은 여전히 아버지인 이방원이 쥐고 있었으며 중앙조정의 대신들도 대부분 이방원파와 오랬동안 세자로 있었던 양녕대군파였기 때문에 세종은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1422년에는 태종 이방원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세종은 시련을 맞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이 세상을 떠난후 조선 개국공신과 원로대신들의 힘은 왕권을 위협할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힘든시기에 맞닥드려 세종은 머리좋은 임금답게 즉위 초기에 원대한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것은 집현전을 통한 자신의 든든한 뒷받침 세력양성 이었습니다. 집현전에서는 도서를 수집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왕의 정책적인 자문을 하는 고유한 기능등을 하였습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국왕의 정책기관으로 삼아 오로지 학문연구와 왕의 자문에는 응하도록 하였고 승진과 대우도 최고로 부여함은 물론 중앙정계에 진출시켜 주요한 요직을 장악하는데에도 목적이 있었습니다. 


종대왕의 주요업적


정음청이라 불리는 관청을 만들고 집현전의 학자들을 지도하여 세종25년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문자는 훈민정음으로 28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3년동안 다듬어 1446년 9월에 반포하여 우리민족의 문자생활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이것이 한글 창제인 것이죠.



세종대왕은 학술문화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여러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팔도지리지등을 인쇄하였으며 특히나 집현전을 설치하고 학자들을 양성하여 정치,경제,사회와 여러 문물제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용비어천가


장영실을 발탁하여 측우기,자격루,앙부일구등 천문기기를 만들고 이순지를 등용하여 천문역법인 칠정산,천문류초,제법역상지등을 저술케하여 과학기술을 진흥시켰고 농업정보와 기술을 종합하여 농사직설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후로부터 곡물재배법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경제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종대왕은 국방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이종무에게 227척의 병선을 이끌고 대마도의 왜구를 응징했으며 최윤덕이 평안도 지역의 야인을 평정하여 4군을 개척하고 함경도 지역에 김종서가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확보하였습니다.


세종대왕때 집현전으로 쓰였던 수정전


이때부터 중앙정부는 집현전을 중신으로 움직이는 신진세력이 생겼으며 의정부와 6조를 통해 성장한 관료들이 서로 세력대결을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때 대결구도는 세종이 죽고나자 문종-단종-세조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정치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참고서적 : 단숨에 읽는 한국사,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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