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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시대

임진왜란,광해군 조선역사에 획을긋다



임진왜란과 광해군은 한국사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6세기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난 배경과 광해군의 활약 그리고 일본의 정세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16세기는 변화의 시대


16세기는 변화의 시대였는데 이때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며 유럽의 역사가 세계사적으로 발전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세계의 변방이었던 일본이 세계강세였던 포르투갈등과 꾸준히 교류를 통했으며 항구가 있는 지역별로 꾸준한 발전을 하여 세계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도요토미히데요시



본의 세계사전면의 등장


막부시대가 끝나고 군벌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될때 총포로 무장한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의 기반을 열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이때 일본의 문제는 승리한 군벌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과 항복하거나 패한 군벌들의 처리가 대두되었는데 이때 마침 내정이 불안한 명나라와 조선이 문제해결의 구실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이때 조선이 아닌 명나라가 일본과 더 가까웠다면 아마도 싹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됩니다.


광해군


진왜란 발발과 선조의 도망


1592년 4월 15일에 9개 부대 총 20만명의 왜병이 부산에 나타납니다. 조선과는 달리 압도하는 조총으로 무장하였고 왜병은 바로 동래부를 점령하고 충주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바로 한양을 점령해버렸습니다.이때 우리의 왕인 선조는 압록강변인 의주까지 피난한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조선의 국방력과 임금의 무능이 문제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입니다. 이때 광해군은 평안도 박천에서 선조와 헤어져 분조를 맡아 이듬해 10월까지 근왕군을 모집하고 의병을 독려하여 실질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습니다. 진주대찹,행주대첩,한산도대첩 등을 통해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반격작전에 성공하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진왜란의 결과


임진왜란은 조선의 농정을 피폐화 시켰는데 일단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많이 감소되었고 농토는 30%가량으로 줄었으며 경복궁,창덕궁,창경궁등이 불에 탔고 수많은 보물과 기술자들도 일본이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통치계급과 국왕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드러냈고 전후복구를 위한 납속책과 공명첩을 통해 신분질서가 무너지면서 양반사회가 빠르게 해체되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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